나에게 싸이월드란?
중학교 때였나, 고등학교 때였나.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쨌든 학창 시절이었다. 지나가는 나를 붙잡고, 남은 도토리가 있으면 달라고 했다. 도토리묵밖에 몰랐던 시절이라 학교에서 왜 묵을 찾는가 싶었다. 당시에 다음 날 학교에 가니 친구들이 변해서 나를 공격하는 판타지 소설을 읽고 있어서 그런지 정말 친구들이 맛이 간 줄 알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단체로 몰래카메라를 한다거나…
하루, 이틀은 그렇다고 치자. 한 두 사람이 그랬다면 그랬다고 치자. 그런데 어딜 나갈 때마다 도토리 없냐는 소리를 들었고, 주변에서도 도토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애초에 내가 소속되어 있지 않은 관심사에 신경을 쏟지 않는 타입이라 묻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반드시 물어서 확인해야 했다.
나에게 싸이월드의 첫 기억은 이렇다.
BGM이라고?
배경음악이라는 단어도 생소했을 당시, 애들이 계속 BGM은 뭐가 좋다고 추천해줬다. 싸이월드의 음악인 건 알겠는데 그래서 배경음악이 뭐냐고…
싸이월드를 통해서 다양한 사람과 "인맥 관리"가 유행했고 거기에서 유명한 홈피(지은 인플루언서)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내 홈피에 깔기도 했다.
BGM(Background Music)을 사기 위해서 도토리를 구매해야 했다. 요즘처럼 손가락 하나만 누르면 결제가 되는 스마트폰 시기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학생이 온라인에 돈을 쓴다는 것은 어른의 입장에서 용서치 못할 "죄"였다. 늦게 싸이월드를 알았지만, 꼭 BGM을 손에 넣고 싶었다. 크게 맘먹고 5일 치의 용돈을 모아 문화상품권을 교환했고 내 인생 첫, BGM을 삽입했다.
쾌걸춘향 OST #2 임형주 팝페라 가수의 "행복하길 바라"
사진은 뭐다? 흑역사
BGM을 넣고, 친구들도 이야기하고 나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즐거웠다. 친구들이 방명록을 남기면 따라서 방명록을 남겨주고 좀 더 친하게 지내고 싶다면 일 촌을 맺기도 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의 홈피는 굉장히 뭔가가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역시 사진.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떤 사진을 올렸다. 댓글이 달렸다. 너무 웃겼다. 부모님 어릴 때 앨범을 보는 것처럼 매우 신기했다. 친구의 앨범이 궁금했고, 친구들도 나의 앨범을 궁금해했다. 사진을 하나씩 올리다 보니, 엄청나게 많이 올라갔다. 보정 따윈 필요 없었다. 남자여서 그런지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다.
지금의 휴대폰 보다 카메라 화소가 낮은 DSLR로 촬영한 것을 아무런 보정 없이 올렸다. 수평 맞춤 따윈 없었다. 그냥 친구들끼리 놀면서 셔터를 눌렀고, 어떤 무리에 DSLR을 가져오는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는 일일 왕이 되어 신하를 누를 자격이 주어졌다. 그게 놀이였다.
당시 유행하던 엽기 사진, 웃긴 사진, 친구들과 미친 척하면서 찍은 영상 등을 재미로 다 올렸었다. 어느 순간 나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기 위한 공간에서 누군가를 웃기기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당시 내 친구들의 싸이월드는 누가 더 웃기나를 올리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런 싸이월드가 없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가고, 군대에서 제대하고, 이런저런 풍파를 맞았다. 싸이월드가 내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졌고, 얼마 뒤 완전히 잊혔다.
완전히 잊힌 줄 알았던 싸이월드의 조각 하나가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싸이월드가 없어진다는 소리에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슬픔이 몰려왔다. 어렸을 때 추억이었고, 엽기 사진, 흑역사의 인생들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떤 누군가 몰래 추억을 훔쳐 가는 것 같았다. 없어진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 재빠르게 싸이월드에 들어가 봤다. 그런데 내 앞에 뜨는 건 "서비스 종료" 팝업
하지만 싸이월드는 살아났다.
곧 다른 회사들에 의해 회생이 된 싸이월드 뉴스를 봤다. 너무 즐거웠다. 인생이 소설이라고 친다면, 앞의 전개 부분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너무 기대했고, 남아있는 도토리의 양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도토리도 살아만 준다면 필요 없었다. 오히려 회사에 기부하고 싶을 정도였다.
약 1주일 전,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누군가에 의한 해킹으로 보안 작업이 추가로 필요해 연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얼마든지,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 오픈하라고 전하고 싶었지만 벌써 세 번째 연기가 되고 있으니 내심 감추었던 불안이 점점 커지고 있다.
만약 해커에 의해 모든 사진이 불법적으로 이용된다면 나의 아름다운 추억은 범죄의 추억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개인정보 따위는 애초에 필요 없다. 이미 나의 개인정보는 어딘가에서 팔리고 있을 테니
다만, 내가 원하는 건 좀 더 보안 작업을 하라는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아닌가. 해커톤에서도 전 세계 수재들을 씹어먹는 IT 강국이며, 이미 광랜 인터넷을 2000년대 초반에 깔아버린 대한민국 아닌가. 그런 나라에서 다른 나라의 해킹 때문에 전 국민의 추억을 범죄에 빠트릴 수 있다는 이야기는 말이 되질 않는다.
너무 급하게 가면 넘어진다. 남들과 같은 속도로 음식을 먹다 보면 체한다. 시동 걸고 풀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엔진이 망가진다. 같은 원리라고 생각한다. 너무 급하게 국민의 추억을 살리려다 준비가 안 된 것이 발견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실망으로 돌아올 것이다.
천천히 꼼꼼하게 서버를 안정화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의 추억과 우리의 추억을 되돌려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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