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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생각] 왜 제주도는 무소속 정당을 뽑을까? - 제주 4.3 사건

by 하안태 2021.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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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지방 선거 등 국가의 중요한 선거를 TV로 볼 때가 많다. 그때마다 이상하리만큼 의문이 든 지역이 있었다. 각종 지역구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데, 왜 제주도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지 않을까?

진보 정당이든, 보수 정당이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문제가 아니었다. 개개인의 정치 성향을 논하기에는 무소속으로 뛰어든 후보자를 뽑았다. 너무 이상하지 않는가? 너무 이상했다. 어떻게 민심이 무소속인 후보를 뽑는 것일지. 매우 궁금했었다.

이러한 궁금증은 선거철이 지나면 금세 까먹었다. 그러던 와중에 TV에서 제주 4.3건을 다루면서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했다. "4.3사건의 충격으로 무소속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닐까?"

제주 4.3건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물론, 4.3 사건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는 알고는 있었지만 부끄럽지만,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찾아봤고, 이를 공유하고자 한다.

 

아름다운 제주도에는 생각보다 아픔이 많은 곳이다. 

 

4.3 사건의 희생자

당시 4.3사건으로 희생자는 대략 3만 명이라고 추정한다. 추정한다는 의미 자체가 자세히 모른다는 뜻이다. 즉, 더 많을 수도 있다. 어쨌든, 3만 명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제주 도민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수다. 안타까운 역사겠지만 제주 4.3사건 진상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말발굽에 치인 아이

제주도에서 1947년 3월 1일 해방 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삼일절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행사가 끝난 후 참가자들은 거리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 통으로 빠져나가고 있을 때,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기마 경찰은 아이를 친 줄 모르고 가던 길을 가고 있었는데 이를 본 시위대 일부가 그대로 지나가는 기마 경찰에 돌멩이를 던지며 항의를 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다른 경찰은 시위대의 폭동이 일어난 줄 알고, 총격을 가했다.

15세 초등학생과 젖먹이 아이와 함께 피살된 여인을 포함, 순식간에 6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6명은 뒤에서 맞았는데 이는 시위대가 아니라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 혹은 시위대를 구경했던 사람이었다. 즉, 시위대와는 전혀 상관없는 주민이었다. 이 사건으로 주민의 흥분도가 극도로 악화하였다.

만약 기마 경찰이 본인 말에게 치인 아이를 발견하고, 미안하다고 사과만 했더라면. 발포 먼저 하기 전에 무슨 일인지부터 확인하는 절차만 있었더라면 무고한 희생뿐만 아니라, 훗날 수많은 희생자가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미군정의 사태 수습

3.1 사건의 분노로 제주도는 민·관 총파업을 실시 3월 13일까지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제주 전체 직장 95%가 파업, 결과적으로 166개 기관 및 단체가 파업에 동참했다. 95% 파업 동참이라 하면, 제주도 전체라고 해도 무방하다.

미군정은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 제주도로 합동조사단을 파견했다. 당시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에는 70%가 좌익단체 동조자이거나 관련 있는 사람이다."고 기술하여 경찰 발포에 대한 잘못을 추궁하기보다는 좌익세력 척결하는 정책을 전개했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좌익 세력 척결 및 제주의 치안을 바로잡겠다는 뜻으로 내륙에서 응원 경찰을 대거 투입했다. 파업 주모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으로 약 200여 명, 1여 년간 약 2,500명이 체포 및 구금되었다.

사태의 악화, 충돌

1948년 4월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의 경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고, 우익단체의 요인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로 인해 경찰 4명과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했다. 이에 미군은 무장대를 탄압하기 위해, 더 많은 경찰을 내륙에서 파견하였고 근본적인 대책 없이 힘과 힘의 싸움으로 아무 관련 없는 민간인이 희생당하고 있었다.

조선로동당과 미군정의 싸움은 4월 28일 72시간 내 전투를 완전히 중단할 것을 합의했지만, 5월 1일 우익 청년 단체가 방화를 저지르게 되면서 협상이 파기된다. 방화사건 직후, 우익 단체의 행동이라 파악하고 이를 보고 했지만, 미군정은 보고를 무시하고 조선로동당의 무장대의 소행으로 조작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탄압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같은 해 9월 9일, 북한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행위를 남한 정부의 정통성에 반하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제주도에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통행 금지시켰다. 만약 무허가로 움직인다면, 폭도 혹은 간첩으로 간주해, 발포를 지시했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역이란 결국은 중산간 마을 전부에 해당하며 이동 금지라는 말 자체는 거주를 금지한다는 의미였다.

태어날 때부터 중산간 마을에서 지냈던 도민들은 결국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고향이 불타고 있는 모습을 본 도민들은 좌절하거나, 정부에 분노하여 무장대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싸웠다. 반대로, 고향을 떠나지 못한 무고한 주민들은 발포 지시에 의해 무참히 도륙당하거나, 강제로 체포되었다. 이것뿐만 아니다. 무장대에게도 죽임을 당했는데, 세화, 성읍, 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결국, 1949년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하였다. 하지만 게릴라 작전으로 민가나 경찰을 습격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식량을 위한 작전이었고, 이들의 수는 50~60명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사살되거나, 이탈한 대원을 보충하기 위해 젊은 남성을 납치해가며 수를 맞추고 있었으나, 점차 줄어들어 결국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대원이 생포되면서 7여 년 간의 제주도의 울상이 걷힐 수 있었다.

 

결론_제주도가 무소속 정당을 뽑는 이유

대한민국 정부는 선거를 위해 제주도를 탄압시켰다. 잘못된 이미지를 씌워가며. 본인이 뽑혀야 하는데, 뽑히질 못하고 있으니 무력으로라도 시위를 치르려고 했다. 미군에 잘 보이기 위해서다. 이념적인 전쟁에서, 이데올로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냉전체제에서 민주주의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조선로동당은 힘을 보여주기 위해 제주도를 탄압시켰다.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져야 하는데, 미국을 등업은 대한민국 정부를 이길 수 없었다. 북한의 원조를 받기에는 너무 멀었다. 제주도를 행복한 섬으로 꾸미기 위한 그들의 최초의 목적은 잘못된 이념에 의해 변질하였다. 그들은 힘을 보여줘야 했고, 약한 도민들을 이용한 것이다.

어느 쪽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옆집의 친구가 죽은 기억은 제주도민에게는 깊고 깊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죽을 때까지 죽지 못했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모두에게 배신당했고, 모두에게 등 돌린 기억은 현재의 자손에게도 넘겨진 듯하다. 제주도에서 무소속 정당을 뽑는 이유는, 이러한 아픔을 잘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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