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

[생각] 어른의 생활 계획표

by 하안태 2020. 12. 23.
반응형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이면 선생님이 꼭 생활계획표를 제출하라고 한다. 누구는 동그라미에 촘촘하게 계획을 짠다. 그럼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는다. 반대로, 다른 친구는 동그라미에 이등분하고 한쪽은 잠, 한쪽은 놀기라고 적는다. 마치 선생님에게 등짝 스매싱을 날려달라는 소리처럼 보였다. 그런데 칭찬을 받든, 매를 맞든 상관없이 그 누구도 생활 계획표를 지켰던 친구는 보질 못했다. 말 그대로 선생님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서다. 오히려 계획보다는 주변 디자인하기 바쁘다. 여기에는 날개를 달고, 여기에는 귀여운 눈과 코와 입을 그리고, 배경은 화사한 색을 선택한다. 방학을 맞이하는 순간에는 늘 이런 모습이었다. 그때의 나도 마찬가지로 '계획'보다는 '그림'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는 매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 아주 촘촘하게 그렸던 스타일인데 칭찬받기 딱 좋았다.

https://grapplet.com/marketplace/entries/2430

그때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 생활 계획표는 '그림'에 가까웠다. 어른이 되고 한참이 지났음에도 이런 편견에 벗어나지 않았다. 방금 문장에서 '못'을 쓰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나에게 생활 계획표는 그저, 선생님에게 칭찬받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으니깐. 지금껏 계획을 세워 생활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어느 정도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할 때는 타임보드 형식으로 단기간 지킬 수 있는 것만 작성했었다. 그러다 보니 단기 기간이 끝나면 다시금 원상태로 돌아갔다. 늦잠을 자고, 책을 읽었고, 친구와 만나서 놀았다. 반대로 계획이 있을 때는? 계획이 있어도 놀았다. 해야 되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에 중심을 두었었다. 그러니, 생활 계획표의 필요성을 안 느낀 것이다.

굳이 오래된 이야기를 여기서 끌고 오는 이유는, 이제는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점점 어떠한 업을 가지고 생활하기 힘든 세상이다. '한 직장'이라는 부모님의 말씀은 당신들의 세상이었다. 물론, 틀린 말은 전혀 아니다. 당시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즐비했던 세상이니깐. 그분들의 말은 그분들의 세상에서만 통용되는 말이다. 우리는 그분들과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적어도 진짜 적어도 굶어 죽는 이들은 없어졌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문제점, 배가 고파서 죽는 것이 아닌 '어떠한' 것 때문에 죽게 생겼기 때문이다.

블로그에 몇몇 글에서 나타냈지만 나는 직장을 다니고 있다. 직장이 오랜 기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는 고민보다는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자칫 잘못하면 둘 다 아니게 된다. 회사가 망해 나도 잘리는 형국이다.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 오늘 쌍용 자동차도 기업회생을 신청하지 않았는가. 어릴 적 쌍용 자동차만 타고 다니면 '있는 집'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지금은 회생 수순을 밟고 있는 기업이 되었다. 비단, 쌍용뿐이겠는가. 과거 대한민국에서 조선(배 만드는 기술)은 가히 전 세계 1위였다. STX도 1위에 한몫을 했던 기업이고. 그들도 망했다.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혹시 2005년에 개봉한 <찰리와 초콜릿 공장> 영화를 봤는가? 주인공 '찰리'의 아버지는 공장에 다니는 사람이었지만 로봇이 도입되어 결국 실직자가 된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는 결국 재취업에 성공하는데, 도입된 로봇을 고치는 기술자로 채용됐다. 뜬금없이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영화를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변화되는 사회 속에서 지금 상태를 유지하려는 사람(찰리 아버지가 로봇으로 실직자가 된 상황)은 곧 퇴보된다. 하지만 이를 수용하고 활용하는 사람(찰리 아버지가 로봇 기술자로 재취업이 된 상황)은 금방 활로를 찾고 진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초등학교 때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생활 계획표를 다시 끄집어낸 이유도 찰리의 아버지와 같다. 다변화되는 세상에서 '편안한 것'만 누릴 수 없다. 귀찮아도, 힘들어도, 하기 싫어도, 누워 있고 싶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단기 계획에만 그쳤던 나의 삶을 생활 계획표를 통해서 변화해 보려고 한다. 특정 누군가를 지목하는 것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하지만, 그래도 찰리 아버지처럼은 되기 싫다. 누군가가 나를 찾아주었으면 좋겠다. 무언가를 할 때 내 생각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을 찾아보고 싶다. 물론, 걸음마를 배우기 전에 뛸 수는 없다. 차근차근 생각해 볼 것이다. 언젠가 찰리 아버지처럼 로봇을 고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반응형

댓글